100일간의 기록

#56 비가 올 때는 엄마 생각이 난다

mercysky 2021. 5. 4. 23:53

종일 비가 내린다. 원래 이맘때쯤에는 반팔도 가끔 입고 다니면서 봄이 사라지고 갑자기 여름이 왔다고 말했던 적도 있는데, 긴 팔과 그 위의 카디건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난 비 오는 날이 좋다. 비 오는 날의 어둡고 잔잔한 분위기가 늘 붕 떠 있는 나와 희석되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든다. 물론, 이건 방금 막 떠오른 구름 같은 생각에 불과하다. 사실 좋은 이유는 따로 있다. 몇 살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어릴 때 엄마와의 대화가 스친다.

"엄마, 엄마는 어떤 날씨가 제일 좋아요?"
"음, 엄마는 비 오는 날!"
"비 오는 날? 왜요?"
"비 냄새도 좋고 비 내리는 거 보는 것도 좋고 그냥 좋아."

더듬어 생각해보면 이런 종류의 대화였다.
맑은 날이 제일인 줄 알았던 꼬마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흐리고 한번 집을 나가면 신발이고 옷이고 다 젖어버려서 오들오들 떨게 하는 비 오는 날이라니.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이후부터 '그냥'이라는 의미를 찾으려 애썼다. 비 오는 날의 좋은 점을 하나씩 알아가면서 그렇게 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날씨를 제일 좋아하게 됐다. 조금 더 자라니 으슬으슬해서 어깨가 움츠러들지만, 그 뒤에 오는 따듯한 시간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 덕분이다. 그래서 비가 올 때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를 대신 기억할 것들이 내겐 너무나 많아서 나중에 자연스레 우리가 이별하게 될 때 이것들이 내게 힘이 되기도 하고 힘이 들게도 할 테지만 일단 비 오는 날은 엄마 생각하는 날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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