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당신이 옳다'고 해줬더라면
사람의 감정은 항상 옳다. 사람을 죽이거나 부수고 싶어도 그 마음은 옳다. 그 마음이 옳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주기만 하면 부술 마음도, 죽이고 싶은 마음도 없어진다. 비로소 분노의 지옥에서 빠져나온다.
슬픔이나 무기력, 외로움 같은 감정도 날씨와 비슷하다. 감정은 병의 증상이 아니라 내 삶이나 존재의 내면을 알려주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우울은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높고 단단한 벽 앞에 섰을 때 인간이 느끼는 감정 반응이다. 인간의 삶은 죽음이라는 벽, 하루는 24시간뿐이라는 시간의 절대적 한계라는 벽 앞에 있다. 인간의 삶은 벽 그 자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우울한 존재다.
-정혜신, <당신이 옳다> 中
어제 새벽부터 종일 이 글귀들을 곱씹는다. 나는 내가 이상한 줄로만 알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짜증도 나고 화도 날 수 있는 건데 그런 감정들이 항상 부정적으로만 치부되어 내가 늘 모든 감정을 통제해야만 옳은 것처럼 여겨져서 아주 답답하다. 자연스러운 반응인데. 그런 감정들이 일어난다고 해서 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내가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지켜보기만 하는 일이 괜히 야속하다. 내가 원한 건 옷에 흙탕물이 조금 튀더라도, 기꺼이 내게 손을 내밀어주는 거였다.
그러면 정혜신 작가가 말하는 거처럼 누군가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 분노의 지옥에서 나올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그저 작은 토닥거림, 따스한 품이 필요했다. 물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를 지켜보고만 있는 게 아닌. 그런데 내가 가장 친애하는 이는 내게 그런 것을 해줄 수 없다고 했다. 그저 내가 잘 이겨내고 훌훌 털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내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니 결국 책임도 모두 내가 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말도 맞다. 아니 이 말이 맞지. 결론적으로는 너무나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딱딱한 결론적인 얘기가 필요한 게 아니다. 뭐가 옳은지 그른지 본인 문제는 본인이 제일 잘 안다. 나는 그저 따듯한 말 한마디, 나를 알아주는 그런 말들이 필요했다. 너무 속상하고 야속하지만, 이것도 나 혼자서만 풀어야 하는 현실이 제일 못 견딜 것 같은 밤이다. 한번이라도 내가 옳다고 해줬더라면. 이것 역시 내 욕심이라고 말하는, 철저하게 남인, 나 혼자만 존재하는 시간 위에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