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간의 기록

#98 나도 무언가를 하는 중

mercysky 2021. 6. 15. 22:18

저번 주부터 전문 상담 기관에서 범죄 피해자를 대상으로 하는 상담을 받고 있다. 나의 마음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억울함, 피해 의식, 분노와 같은 감정적인 부분에서 컨트롤이 잘 안 되는 점이다. 나의 안전한 영역을 누군가 침범하여 나에게 해를 가하고, 그 피해를 고스란히 나 혼자만 떠 안아야 했던 날들. 거기서 오는 억울함이 잠을 설치게 했고 2차 가해자들에 대한 적개심을 극으로 치닫게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근무지에서 근무 시간에 일어난 일임에도 보호받지 못했고, 거기에 더해서 권력으로 인해 처참히 짓밟혀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참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담사분이 자기 생각은 다르다고 하셨다. 나는 무력하게 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곳에서 나의 이익을 위해 버티고, 그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뭔가를 계속 해내고 있다고 하셨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그런 게 아니라고.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너무나 억울하고 분노했으나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하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니.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나는 자존감이 높고 주관이 뚜렷해서 내 영역을 지킬 힘이 있다고 했다. 화가 올라오면 그 감정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호전될 수 있다고. 그리고 내가 평소에 글로 쓰며 반성하고 자책하던 나의 행동들이 트라우마였단다. 나의 불안을 초점화해서 계속 깊이 빠지고, 깊이 빠진 나를 보면 다시 자책하고, 그러다 보면 불안해지고 또 화가 나면서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문제를 계속 들추고 직면하다 보면 한동안은 힘이 없다는 게 느껴진다. 감정적인 소모가 심해서 일상의 사소한 것들에 관심이 없어진다. 그리고 긴가민가했던 나의 모습 중에 알게 된 건 반골 기질이 있다는 것이다.
건드려서는 안 될 성향의 사람을 건드려놨으니 폭발하는 건 당연했다. 나의 지난 경험들과 합쳐져서 권위 불안도 보이기도 했다. 상담을 받고 나면 기억을 계속 꺼내 보여 그런지, 쉽게 작은 일에 달아오르고 예민해진다. 그래도 고치고 싶고 나의 기능을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하고 싶다. 내가 화가 나고 억울한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감정이고,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고 하셨다. 안정화가 되고 감정 컨트롤이 잘 된다면 그 이후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대인관계 기술까지 배우기로 했다. 상처를 들춰내서 제대로 치료하려니 여간 아픈 게 아니다. 나아지겠지? 정신적으로 무척 피곤하다. 얼른 회사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다.